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크거나 작은 실수들을 한다. 나 또한 많은 실수를 하면서 인생을 살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실수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까지 나는 그냥 노는거 좋아하고 아무 인생의 계획 없이 하루하루를 그냥 살았었다. 그냥 남들 눈에 안 띄는 것을 선호하고 안전한 것을 선호했기에 별로 모험적인 일은 하지 않았고, 학교 등하교 하고 학원 가고 남들 하는 것처럼 일상을 살았었다. 그러다가 내가 나의 의지로 뭔가를 해보려고 시도 한 적이 있는데, 대학교 진학 후의 일이다.
대학교 1학년때는 MT다 뭐다 해서 매일 노는 것과 술먹는데 돈과 시간을 썼다. 수업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동기들이 군대를 한두명씩 가기 시작하고 나 또한 가야 된다는 압박이 시작 되었을 때, 어떻게든 군대를 편하게 가기 위해서 내가 능동적으로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토익 시험을 보고 커트라인을 넘어서 카츄사에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토익 시험을 치는 것이 귀찮아서 모의고사만 해보다가 그만 두었다. 지나고 보면 그 당시의 나는 지금의 내가 보면 달려가서 뒷통수를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말 그대로 게으름의 표상이었다.
그렇게 군대를 어쩔 수 없이(?) 신청 해 놓고 나니 보다못한 아버지께서 게으른 나를 끌고 군대가서 고생하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체력 단련을 해야 된다며 남한산성으로 끌고 가셨다. 무척이나 귀찮았으나 온 가족이 다 같이 갔기에 어쩔 수 없이 끌려 갔었다. 이것 또한 매우 수동적인 나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306 보충대로 입대를 하는 날은 도살장에 억지로 끌려가는 소같은 느낌으로 남들 가니까 그냥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보충대 안에서 또 다른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나의 체중을 검사하는 검사관(정확한 신분은 나도 잘 모른다. 아마 대부분의 전역자들도 잘 모를 것이다.)이 나의 체중이 공익근무요원의 조건과 군 입대의 조건의 경계에 정확히 걸쳐있다고 이야기 하였다. 내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질문을 하였다. 그 검사관의 대답은 지금 군대를 가는 것이 첫번째 선택이고, 내년에 다시 보충대에 와서 재검을 받는 것이 두번째 선택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보충대에는 나와 같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다. 대다수는 체중이 더 많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 화장실에서 물을 먹는 행동 등을 보였다. 처음에는 그러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 단순히 목이 많이 마른데 물 마실 컵이 없어서 그냥 수돗물을 마시는가 보다 했는데 체중검사 때문인걸 알게되니 이해가 가는 행동이었다. 어쨌든 검사관의 질문에 나 또한 고민을 잠깐 했었으나 그동안 부모님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도 내가 군대를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서 집으로 돌아가면 내가 모자란 사람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자존심 때문에 그냥 입대를 선택하였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매우 멍청한 선택이었다. 재검을 그날을 포함해서 총 5번을 받아야 된다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영원히 군대를 안 갈 수도 있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인데 소중한 2년을 아낄 수 있는 선택을 하지 않음으로써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의 2년을 버렸다. 물론 대다수는 군대를 가야되고 의무이니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안 갈 수도 있는 것을 간 것이 지금 나에게 전혀 득이 되지 않았기에 후회되는 것이다.
군에 있으면서 배운 것은 사람들은 정직하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으며 지극히 감정적이고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선임들은 내가 내지르는 고함 소리(관등성명, 대답)에 나를 인식하고 내가 성실한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일을 하는 척만 하면서 꾀병을 부리고, 화장실에 숨어서 소설이나 잔뜩 읽다가 업무에 복귀해도 별로 뭐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나는 오만가지의 꼼수들만 터득하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부정적이지만 일반인들이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기가막힌 일들을 저질렀으나 따로 작성하지 않겠다. 군대 얘기가 길어봤자 재미 없을 뿐더러 자칫 군의 위신에도 먹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얘기가 길어졌는데 군대에 간 것은 어찌보면 편한 길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무슨 소리냐면 군대를 안가는 것은 편법이고 반드시 방법을 찾아서 공익마저 하지 않으면 그것은 기존의 질서를 벗어나는 행위인 것이다. 실제로 내가 만약에 그 당시 재검을 신청해 놓고 유학을 가서 그곳에서 시민권을 따서 국적을 바꿔버린다면 나는 영원히 군대를 안가도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돈으로 그것이 가능하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집은 그게 가능한 집이었다.
처음이 길었는데 군대 입대 한 것은 내 인생 첫번째 실수였다.
그리고 두번째 실수가 뭔지 이야기 해보겠다.
내가 저질렀던 두 번째 실수는 연애에서 실패한 것이다. 아니 수없이 많이 실패해서 이제는 도대체 몇 번째 실패인지 셀 수도 없다. 그냥 성공한 적이 없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와 같은 실패를 수 없이 많이 했는가?
나는 남자들이 항상 핑계대기 좋아하는 남중, 남고, 공대, 군대 테크트리를 열심히 타면서 여자아이들과는 그 어떠한 교류조차 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거기에다 초등학교때부터 초고도 비만이었고 고등학교 시절 즈음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머니께서 동네에서 접촉 사고가 나셨는데 상대방 운전자인 아저씨가 삿대질을 하고 욕설을 했었다. 그 때는 한여름이라 불쾌지수가 높아서 인상을쓰고 그 아저씨한테 다가 갔었는데 갑자기 태도가 180도 바뀌더니 이동네 사시냐면서 무척이나 공손한 태도를 보이다 부리나캐 도망갔었더랬다. 그 당시의 거울속의 나는 조폭 영화의 등장인물과 같은 모습이어서 연애를 포기한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군대에 있으면서 극적으로 감량을 했고 졸업 전에 어학연수를 하게 된다.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하는 중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정도 미국 생활에 적응이 되니 문득 외롭다는 감정이 들었다. 특히나 내가 봤을때 진짜 별거 없는 남자들도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을 보고 나니 나도 가능하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 당시에 친하게 지내던 여자애들이 있었는데 같이 수업을 들으면서 어느 정도 친해졌고 기숙사 옮길 때 이삿짐 옮기는 것도 도와주면서 든든한 오빠와 같은 존재가 되었었다. 게다가 같이 여행도 가고, 야구 경기, 농구 경기도 보면서 같이 자주 어울리는 친한 오빠 동생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자애가 (이름을 밝히면 괜히 흑역사에 현타만 오는거 같아서 밝히지 않겠다.) 나에게 술을 먹자고 하였다. 같이 술을 먹으면서 무슨 할 말 있는지 물어보니 사귀던 남자애가 자기를 차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무척이나 마음이 아프다고 그러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 여자애는 내가 맘에 두고 있었는데 남자친구가 있어서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며칠 뒤에 술의 힘을 빌려서 대시를 했는데 바로 차였다. 그런데 차이고 나니 그동안 유지되었던 오빠동생 관계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에도 다른 여자애한테 또 차여서 어학연수 기간 중에 총 두번을 차였다.
그렇게 어학연수를 마치고 졸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나 또한 남들처럼 만나는 이성이 있어야 언젠가는 결혼을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거기다 주변사람 중에는 저 사람은 나보다 못났는데도 여자 친구가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니 나도 이제는 가능하다고 내심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학교 동창이 여자를 소개시켜준다고 해서 좋다고 받아들였었다. 그 때는 나의 객관적은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내 머릿속에 있는 여성의 기준만 무척이나 높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당시 200만원도 채 되지 않는 월급을 받으면서 체중은 다시 늘어서 100kg에 육박했고 집안에 돈이 많기는 하지만 내 스스로의 비전은 별로 내세울게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자를 소개 받았는데 만나는 여자들이 다들 내 기준에 모자라다고 느꼈다. 여기서 내 기준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외모를 말하는 것이다. 언제나 나의 기준은 TV에 나오는 연애인에 맞춰져 있었고 그 연애인이 사귀는 남자의 급이 어떤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어느 정도 마음에 들고 젊고 예쁜 여자애를 만나게 되었는데 애프터 신청을 보기좋게 거절 당했다.
아마도 이번에는 대충 출퇴근 할 때 입는 옷(당시 직장에서는 정장이 아니라 캐주얼도 허락이 되었었다.)을 입고 소개팅 자리에 나가서 더치페이 얘기나 하고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으니 여자애 입장에서 보았을 때 나는 형편없는 남자였을 것이다.
그 후로 직장을 그만두고 직장 다닐 때 들어 놨던 보험을 해지할려고 하는데 보험설계사가 개인적으로 나를 보자고 하여 나가보니 여자를 소개시켜 준다고 하였다. 별로 손해볼 것도 없고 괜찮은 여성이면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보험을 해지 하는 대신에 여자를 소개받았다. 이번에 소개받은 여성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데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보니 보험설계사는 아니고 보험사에 행정일 하는 직원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좀 잘 보이려고 옷도 잘 차려입고 신경써서 나갔더니 바로 거절 당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몇 번의 데이트를 이어갔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교제까지 가보자는 마음에 친구의 조언을 통해서 근사한 레스토랑에 불러서 데이트를 하다가 사귀자고 이야기를 했는데 선뜻 알겠다고 하였다. 집에 데려다 준다고 얘기했는데 대중교통 있는 곳에 내려준다면 된다고 하여 그 곳에 내려주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다시 생각해보니 아닌 것 같다. 미안하다’ 는 카톡 한 통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겼다.
무척이나 기분이 상하고 배신감도 느꼈다. 바로 보험사에 전화해서 보험계약을 몽땅 해지해버렸다. 그렇다고 기분이 별로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나는 또다시 빌어먹을 패자라는 실패자의 정체성만 스스로 씌워버려서 그 이후로는 누가 소개를 시켜준다고 해도 별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크게 관심도 줄어들었다. 그렇게 되고 보니 모든 것에서 실패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다.
자 그럼 나의 실패에서 내가 실수 한 것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그것은 바로 나의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했고 여성의 심리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에 있다. 단순히 내 기준에서 이렇게 하면 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과 연애도 별로 안 해본 친구들의 조언에 의해서 계속해서 실패를 반복하게 되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을 거절과 실패가 당연한 패자의 인생을 스스로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지금은 생각이 전혀 다르다. 진화심리학 책과 뇌과학 책들을 읽으면서 여성은 어떤 남자에게 끌리는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해야 객관적으로 좋은 수준까지 끌어올려서 맘에 드는 여성에게 대시 할 수 있는지 복장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 이런 것들을 알게 되면 알게 될 수록 과거의 내가 실패한 것에 대한 불만은 전혀 노력하지 않은 게으름뱅이 패배자의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아직 사귀는 여성은 없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 시간이 더 흐르면 반드시 내가 맘에 들어 하는 여성을 사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다. 물론 내가 기준을 낮추면 얼마든지 여성과의 교제는 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지만 코로나 사태가 덮친 이후에 책을 읽고 깨닫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코로나가 종식 되고 나면 기준을 낮춰서 내 수준에서 가능한 여성을 시작으로 많은 이성 교제를 시도할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의 실수를 이야기 해 봤는데 크게는 두 가지이지만 실패 횟수는 셀 수조차 없을 지경이다. 소개팅이나 미팅에서 거절 당한 것에서 데이트를 이어나가다가 차인 것 까지 내가 원치 않아서 상대방을 거절한 것은 제외해도 그토록 많다.
실수를 덜 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야 하고 실수를 하고 실패를 했을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책을 읽어야 한다. 누가 들으면 책 장사하려고 이런 글을 써 놓았는가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오늘 내가 이 글을 쓴 것도 책을 보고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서 글을 쓰기 시작 한 것이다.